Learning the Church

전례문 안에서 존댓말과 반말의 의미

대림시기를 시작으로 수정된 미사경본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는 사제의 인사에, “또한 사제와 함께”라고 응답했던 문장이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로 변경이 되었죠. 이 문장을 토대로 전례문 안에서의 존댓말과 반말에 관련한 내용을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저 문장 “Dominus vobiscum. – Et cum spiritu tuo.”는 직역하면, “주님이 너희와 함께 – 또한 너의 영과 함께”가 되겠습니다. 많은 유럽 언어에는 주어에 존칭과 반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전례문과 기도문(이하, 전례문) 및 성경에는 하느님, 예수님을 칭하는 단어는 모두 반말로 쓰여있습니다. 성모님과 성인들 그리고 전례에 참례한 다른 회중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유럽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느님의 관념 때문인데요. 그들에게 있어 하느님의 관념은 다른 무엇보다도 ‘아버지’로서의 존재가 앞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관념은 창조자, 심판자, 주인님, 임금님 등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관념은 ‘아버지’인 것이죠. 그래서 가장 기본적인 기도인 성호경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이라고 제정되어 있습니다.

언어는 그것을 쓰는 집단의 문화를 나타냅니다. 유교문화가 강한 우리나라에서는 부모님을 비롯한 연장자들에게 꼭 존댓말을 써야 하지요, 그렇지 않으면 버릇 없다고 혼쭐이 나겠지요. 연장자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게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하지만 유럽인이 존댓말을 하는 경우는 처음 만난 사람, 어색하거나 친하지 않은 사람 또는 사무적이고 공식적인 관계일 때입니다. 예를 들어 방송에서 시청자들에게 말하는 것, 안내 방송을 하는 것들 말이지요. 하지만 가족에게는 나이를 불문하고 반말을 사용합니다. 가족이 아니라도 친하면 반말을 하지요.

우리가 ‘할아버지, 식사 하셨어요? 할머니, 어디 가세요?’한다면 유럽인들은 ‘할아버지, 밥 먹었어? 할머니, 어디 가?’ 이렇게 말한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들의 이런 문화적 특성이 그대로 신심에 적용되었습니다. 하느님, 예수님, 성모님 그리고 모든 성인들과 신앙 안에서의 형제자매 모두는 가족이기 때문에 반말을 사용하는 것이죠. 그래서 미사 중에 사제와 회중이 주고받는 그 문장도 직역하면 ‘주님이 너희와 함께 – 또한 너의 영과 함께’가 되는 것입니다.

‘왜 하느님께 반말을 하냐’고 그들에게 물으면 이해를 못할 겁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사무적인 관계도 아니고 남도 아닌데 왜 존댓말을 사용하냐고 반문하겠죠. 우리가 부모님이나 친지 어른들께 존댓말 쓰는 것도 이해 못하겠지요. 그저 문화의 상대적인 차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시 전례문 얘기로 돌아와서, 우리나라에서의 경우를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직역이 아무리 이렇다 해도 수백년 넘게 이어져 온 우리의 사고방식이나 언어습관 마저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전례문/기도문에서 인칭대명사에 동사까지 모두 극존칭으로 쓰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들에게는 하느님이라 하면 뭔가 ‘아주 높으신 분, 지엄하신 분, 임금님, 윗사람’이라는 생각이 크기 때문이죠.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찬미가 아닌 우리끼리의 대화(평화를 빕니다)에서도 존댓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도 반말 직역문을 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전례문을 보면 ‘나 너를 찬미하오니’, ‘나 네게 구하오니’, ‘네 머리를 꾸미오리’ 등등 ‘너’라는 말을 썼던 것입니다. 하지만 동사는 극존칭(~하오소서)으로 쓰면서 인칭대명사만 반말로 하니까 뭔가 어색한 문장이 되어버리고 우리의 문법에도 맞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모두 극존칭으로 통일해서 전례문을 개정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사제와 함께’를 우리의 존댓말 문화를 감안해서라도 ‘또한 당신의 영과 함께’로 바꾸지 않고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로 택한 것은 우리가 2인칭 존칭을 쓸 때 인칭대명사보다는 직함을 주로 사용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의 대화를 생각해 보시면 알 것 같은데요, 얼굴을 맞대고 하는 대화에서 당신, 귀하라는 말은 드물게 쓰이고, 신부님, 수녀님, 선생님 등등 그 사람의 직함 등으로 우리는 존칭을 쓰잖아요. 즉, 그 지역 공동체의 오랜 관습이나 사고방식은 유지하는 범위에서 원문의 뜻을 최대한 살려서 직역을 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새 성가집과 새 전례문으로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해, 하느님 보시기에 합당한 전례를 봉헌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기도가 필요합니다.

저는 살고 싶은, 삶의 이유를 못 찾겠어요. 저에게는 불행한 어린시절, 나에게 진정한 가족은 없는 현실의 내 가정,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3job을 뛰면서 살아가도 아이들은 늘 불만과 엄마에 대한 언어폭력만 있을 뿐.... 제가 인생의 어떤 이유로 이 삶을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무엇보다 목숨과도 같았던 신앙이 이제는 주님이 너무 오랫동안 저를 이렇게 지옥과 같은 삶속에 내버려 두신다는 생각으로 신앙을 져버리게 되네요. 저에게 삶이 주님의 선물이라는 작은 이유를 하나만 주세요. 하느님. 내 희생과 내 십자가만 있는 삶이싫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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