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th & Life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하느님은 눈으로 볼 수 없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믿을 수 있나요?

교회 안에서 활동을 하면서, 많은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상담을 하면서 굉장히 자주 받는 질문입니다. 또한 굉장히 기본적인 물음이기도 하지요. 오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해보려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영상을 통해서도 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눈으로 하느님을 볼 수 있나요? 안타깝게도, 우리는 눈으로 하느님을 볼 수 없습니다. 성경에도 그리 말하고 있지요.​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1요한 4,12)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요한 1,18)

하지만 성경에 또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요한 4,24)

영은 물질이 아니라 비물질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가지고 감각적으로 이 영적인 영역을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우리의 의지를 초월하여, 하느님의 신비로 인해 그런 경험들이 이루어질 수는 있지만요. 많은 성인들이 그러한 경험을 했었지요.

우리는 눈으로 하느님을 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인 것이죠.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다고 하죠. 믿음이 없으면 하느님이 존재하신다는 그 자체를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진짜 계신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냥, 교회가 그렇다고 하니까 무조건 믿는다고 우기고 가야하는 걸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성을 통해서 하느님의 존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성을 통한 신 존재 증명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나누지 않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지에 대해, 예전에 만났던 한 청소년 친구와의 면담 경험을 나눠보려 합니다.

​오래전의 일인데요. 저는 피정 봉사를 하면서 피정에 참가자로 온 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 친구는 말수가 적은 조용한 성격이었는데, 어릴 때부터 본당에서 복사를 섰던 친구였습니다. 오랫동안 꾸준히 복사를 서며 봉사를 했지만 신앙심에 의문이 많았던거 같아요.​

피정에서 아이들과 면담 시간이 되면 대부분 비슷합니다. ‘선생님 전 할 말이 없어요.’ 이게 대부분의 아이들의 인사말이거든요. 저는 이런 저런 질문을 하면서 어떻게 지내는지 일반적인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왜 피정에 오게 되었는지, 피정은 할만한지 어떤지 솔직하게 이야기 해도 된다고 마음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그 친구가 불쑥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해왔습니다.

 

선생님, 하느님은 볼 수 없잖아요?
선생님은 본 적 있어요? 없죠?
그런데 어떻게 하느님이 계시다고 믿을 수 있어요?
저는 제가 본게 아니라서,
하느님도 성경도 다 못 믿겠어요.
다 가짜고 없는거 같아요.

저는 이 친구의 질문이 너무 귀여웠어요. 사실 저도 이런 의문과 고민을 오랫동안 했었고, 지금처럼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는 저 역시 철저한 무신론자였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이 친구에게 질문을 하며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너는 프랑스 파리에 에펠탑이라는 게 있다는거 알아?”
“알죠.”

​“가봤어?”
“아니요.”

​“근데 어떻게 알아?”
“책에도 있고, 가서 보고 온 사람들도 있으니까 알죠.”

​“니가 본것도 아닌데 어떻게 사람들 말만 믿고 그게 진짜라고 믿을 수 있냐? 난 에펠탑도 없을거 같은데…?”
“………..”

 

그 친구는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고 그렇게 면담은 끝이 났습니다. 표정도 별로였고 반응도 없고 해서, 저는 솔직히 큰 기대는 안했습니다. 그저 나는 내 몫을 했고.. 하느님께서 부르셨으니 알아서 하시겠지라고 의탁하며 기도할 따름이었죠. 그렇게 2박 3일간의 캠프 같은 피정을 마치고 아이들과 작별 인사를 하는데, 그 친구가 저에게 오더니 갑자기 이렇게 말하는거에요.

선생님.. 집에 가기 싫어요.
하루만 더 하면 안돼요?

 

말도 없던 녀석이, 재미없다고 참여도 잘 안하고, 첫날부터 집에 가고싶다고 이야기하던 녀석이.. 하느님은 가짜인거 같다고 그러던 녀석이.. 피정이 끝나는게 아쉬워서 집에 가기 싫다고 하니 엄청 놀랐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일어났나 보다 싶었죠.

숫기가 없던 그 친구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결국 알려주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는데요. 며칠 뒤에 싸이월드에!! 그 친구가 피정에서 체험한 일을 본인의 공개 일기장에 장황하게 적어놓은 것을 읽게 됐습니다.

​그 친구는, 저와의 면담이 끝난 후.. 자신이 그 동안 마음을 닫고 하느님이 없는거 같다며 믿지 않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의심과 불신에 대해 진심으로 회개하였고, 고해성사를 통해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성사를 통해 그 친구는 하느님을 체험하게 되었죠.

​그렇게 하느님이 없다고 의심하고 믿지 않던 자신을, 변함 없이 사랑하시고 용서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고 이제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야겠다고 다짐도 하더라는거죠.

 

네, 물론 에펠탑은 실재로 가서 볼 수 있지만, 하느님은 볼 수 없죠.
이 비유가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수 있습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건 그런 합리적인 비교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성을 통해 하느님을 알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논리적이고 계산적인 사고만으로 의문을 품다보면 하느님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이런 합리적인 사고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제한하려는 유혹에 빠지게 만들곤 하니까요.

정말 중요한건, 의심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하느님 그분을 알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의심할 수 있습니다. 다만, ‘진심’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은 거에요.

진정으로 하느님을 알고 싶다면, 교회를 통해 은총을 체험하고 싶다면, 의문의 돌을 잠시 내려놓을 수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눈으로 하느님을 볼 수는 없지만, 믿음 안에서 하느님을 체험할 수는 있으니까요.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성체성사 안에 온전히 현존하시는 그분의 사랑,
고해성사를 통해 날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자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를 오르시는 신비의 미사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주님과 함께 있으면 그분께서도 여러분과 함께 계시고,
여러분이 그분을 찾으면 그분께서도 여러분을 만나 주실 것입니다.”
(2역대 15,2)

​봉사를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서 하느님이 빠져 있다면, 우리가 교회 안에서 전례 안에서 말씀 안에서 하느님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실망하고 상처 받았을 때 우리는 봉사도 신앙도 버리고 교회를 떠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먼저 받아들인 사람은, 어려움이 왔을 때 흔들릴 수는 있지만, 믿음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고..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 때문에 힘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증거와 논리를 핑계로 주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지 못하게 문을 닫고 있다면,
이제는 활짝 열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
저는 당신이 정말로 살아계시는 분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의심이 들어요!
하지만 정말 당신이 살아계신 분이시라면, 나를 사랑하신다면,
저도 그 사랑을 알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저도 당신의 사랑을 알고 싶습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묵시 3,20)

기도가 필요합니다.

필립보 전 노상전교회 회장님께서 골수혈액암으로 원자력병원에 누워계십니다 몸도가누 지못하시고 드시지도 못하시고 힘든 병마와 힘겨운 시간을 보내시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의 기도 요청드립니다 부탁드립니다 병마를 아겨내고 다시 주님의 일을 열심히 헐수 있도록 먾은 분들의 기도 부탁드립니다 꼭 일어서실수있게 꼭~~~ 감사합니다 모든분들 건강관리 잘하시고 가정에 평화를 빕니다 아멘!!
필립보 노상전교회 전 회장님이 많이 아프십니다님이 요청하신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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